함양박씨

박씨 하면 밀양 박씨냐고 물어본다.
난 함양 박씨라고 대답한다.
박씨도 그 종류가 좀 있다.
내가 아는 거로는 순천박씨정도 였는데 찾아보니 꽤 많다.
갑자기 웬 성씨 얘기냐 하겠지만..
그래도 한번 보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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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咸陽)박(朴)

함양(咸陽)은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속함군(速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치고 고려 현종(顯宗)때 함양군(咸陽郡)이 되어 합주(陜州 : 합천)에 속하였다가 함(含)을 함(咸)으로 고쳐서 함양(咸陽)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함양현(咸陽縣)으로 강등되었으며 조선 태조 때 군(郡)이 되었고, 1914년 안의군(安義郡)의 7개면을 병합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이속시켜 함양읍으로 승격시켰다.

신라 종성(宗姓)의 후예인 함양 박씨는 경명왕(景明王: 신라 제 54대 왕, 재위기간 : 917 ∼ 924)의 세째 아들 언신(彦信)이 속함대군(速咸大郡)에 봉해졌으므로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고, 속함(速咸)이 함양(咸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貫鄕)을 함양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중시조(中始祖) 선(善: 예부 상서를 역임)의 현손(玄孫) 신유가 고려 고종(高宗) 때 김경손(金慶孫)과 더불어 나주(羅州)에서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고, 슬하에 아들 6형제를 두어 검교군기소감(檢交軍器少監) 지문(之文)을 파조(派祖)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와 문원공파(文元公派: 지빈)·함양군파(咸陽君派: 지량)·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지수)·어사공파(御史公派: 지온)·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지영) 등으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 장(莊)의 아들 충좌(忠左)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폐신(嬖臣) 박 연(朴 連)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무고를 당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나와 개성부윤(開城府尹)을 거쳐 충목왕(忠穆王) 때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왕(王)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 중국 당태종과 신하의 문답이나 군신사적을 분류 편찬하여 위정자의 참고로 했던 책)>를 시강(侍講)했고, 당대의 석학 역동(易東) 우 탁(禹 倬)과 쌍벽을 이루었던 역학(易學)의 대가로 명망이 높았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불교의 배척을 상소했던 초(礎 : 문량공이의 손자)는 조선이 개국되자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세종(世宗) 때는 북변에 여진(女眞)의 잦은 침입으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 용성(龍城)으로 옮기려 하자 이를 반대하여 국토가 좁아드는 것을 막았다. 중추원사(中樞院事) 신(信)의 아들 안(安)은 창왕(昌王) 때 원수(元帥)로서 대마도(對馬島)에 잡혀 있던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조선 태종(太宗) 때 경기도 수군도체찰사에 이르렀다.

세종(世宗) 때 전라도 수군처리사(水軍處理事)와 도총제(都摠制)를 역임했던 실(實)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실(實)이 어릴 때 그의 아버지 안(安)이 전라도의 도안무사(都按撫使)로서 항복한 왜적들을 처리하였는데 그때 왜인에게 군사기밀을 알리는 말을 하였다고 하여 태조(太祖)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斬刑)을 받게 되었다. 이때 실이 경비가 삼엄한 궁궐 안에 잠행하여 태조의 대전 앞에서 뒹굴며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태조는 실의 효행에 감동하여 구명사절을 보내어 형이 집행되는 순간에 안(安)이 구명되었고, 실(實)은 보은의 뜻으로 나라에 충성하여 당상관까지 올랐다고 한다.

한편 태종(太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습(習)의 현손 세무(世茂 : 생원중검의 아들)는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거쳐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명종(明宗) 때는 내섬시정(內贍시正)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고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저술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큰 공을 세워 정국일등공신(정國一等功臣)으로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진 영문(永文)과 명종조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민헌(民獻)이 유명했으며, 현령(玄齡)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아우 희령(希齡)과 함께 순절하여 가통을 세웠다. 돈령부정(敦寧府正) 세영(世榮)의 아들 대립(大立)은 조선조에서 가문을 일으킨 중흥인물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중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 양주 교수(楊州敎授)를 거쳐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올라 수십년 묵은 송사(訟事)를 해결하여 지평(持平)에 올랐으며, 선조조에 판의금부사(判義禁部事)과 판돈령부사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선조 즉위에 공을 세웠던 소립(素立), 호조 참판(戶曹參判) 정립(挺立), 주자학(朱子學)에 심오했던 지계(知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올랐던 내정(乃貞)과 감찰어사(監찰御史) 득겸(得謙),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승운(承運) 등이 뛰어났으며, 군수(郡守) 창(敞)의 아들 종부(宗阜)는 인조(仁祖)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과 헌납(獻納) 등을 거쳐 김제 군수(金提郡守)로 나갔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앞장 섰다가 함북 안변(咸北安邊)에서 순절한 기봉(基鳳)과 학자(學者) 의병장(義兵將)으로 유명했던 기대(基大)가 뛰어났으며, 봉천감옥(奉天監獄)에서순절한 찬희(燦熙)은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고, 일본 천황을 죽이려했던 열(烈 : 영수의 아들)과 함께 함양 박씨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남한에 총 25,113가구, 103,2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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