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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6]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6]

이 름 강인선 조 회 1571 추 천 12






데보라가 워싱턴 시내에 집을 산 후 파티를 열었다. 두어시간 떠들고 놀다가 데보라에게 “이제 가야겠어”라고 했더니, 선뜻 “그래 잘가” 하고 손을 흔든다.

한국사람들 모임에서라면, “왜 벌써 가냐. 좀 더 있다 가라”면서 몇번이고 만류했을 것이다. 미국친구들의 파티에 처음 갔을 때는, 중간에 간다고 해도 ‘아무도 붙들어주지 않는 것’이 내심 섭섭했다. 왜 도중에 떠나야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준비가 돼 있는데 누구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안녕. 또 보자!” 그러고 끝이었다.

한밤중에 조용한 도시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홀가분했다. 실컷 놀았으니 이제 돌아가서 기사를 쓰고 기분좋게 하루를 마무리하자는 생각뿐이었다. 만일 한국사람들의 모임이었다면 뒤통수가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다들 남아 있는데 왜 너만 가는 거지?’하는 비난의 화살이 날아와 꽂혔을 것이므로.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한국인들의 모임에 갔다가 다음 약속이 있어서 일찍 자리를 떴다. 다음날 누군가 비난조로 “너만 먼저 갔어”라고 말해주었다. 그렇다. “너만!” 그게 유죄다.

한국에서는 ‘남들과 어떻게 어울리느냐’가 중요하고, 미국에서는 ‘자기 자신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더불어 사는 사회’와 ‘혼자 살아가는 사회’의 차이다. 한국에서 잘 살려면 다수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하다 못해 점심을 먹을 때도 남들이 다 자장면 시키면 별나게 굴지 말고 자장면 시키는 게 좋다. 모난 돌이 되어 정맞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을 좀 죽이고 전체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원만하게 사는 비결이다.

하지만 미국사람들 속에서는 자신의 의견이 뚜렷하지 않으면 좀 모자라든지, 뭔가 숨기고 싶어하는 음침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준다. ‘네가 원하는 바는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물어대며 자발적인 선택을 권장하는 미국에서는 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남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보다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혼자 놀 줄 알아야 한다.

한국에 살다 보면 좀처럼 자기 자신과 사귈 시간이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인간관계가 끈끈하게 발전하기 때문에, 웬만큼 독하고 냉정하지 못하면 이 끈끈한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니 나보다 남들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반면 미국사회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다. 인구밀도가 낮아서 물리적인 거리가 먼 것도 한 요인이지만, 서로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 사이의 일정 거리가 유지된다. 그래서 미국생활은 외롭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 사생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미국생활에 적응하는 첫 1년 동안 느꼈던 희열과 고통은 바로 내 앞에 통째로 굴러떨어진 ‘나만의 시간을 요리하는 법’을 배우는 데서 왔다. 미국 사람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대부분 혼자 힘으로 살아가니까, 스무살을 전후해서 홀로서기를 배운다. 경제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만수산 드렁칡이 얼키고 설킨’ 것처럼 살아가는 사회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내 문제를 남들이 자신의 일처럼 공유해주었다. 그래서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거기에 의지해왔다.

나를 떠받치고 동시에 억압하던 칡넝쿨에서 떨어져나와 미국사회에 적응하느라 악전고투하는 동안, 나는 자유와 독립은 고독과 책임을 대가로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들이야 뭐라든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면서, 그에 따른 위험부담을 혼자서 져야 한다는 것도 체험으로 이해했다. 남들과 함께 큰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갑자기 혼자서 나뭇잎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처럼 힘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가 노저을 수 있는 속도만큼 갈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래도 어찌 할 수 없는 한국사람이니까 웬만하면 남들 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남아 있다. 그래서 ‘너만 일찍 갔어’라는 한마디 말에도 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외로울 틈을 전혀 주지 않는 끈끈한 인간관계가 그리워 향수병이 도지기도 한다. 하지만 ‘네가 네 일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할 것이다’는 경고는 언제나 정신을 번쩍나게 만든다.



날짜: 2004-07-12 09:20:14, 조회수: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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